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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인물

  • 이항복 (李恒福)【본관 : 경주(慶州), 1556~1618】

    조선시대 문신. 포천에서 배출하였고, 가산면 금현리에 묘와 신도비가 있다. 조선시대 때 여러 요직을 두루 거쳤고 특히 왜란때는 지혜롭게 사직을 보존하고 민생을 구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강직한 성품과 드높은 학식으로 조선시대의 이상적인 관료상으로 후세에 귀감이 되고 있다.

  • 이덕형 (李德馨)【본관 : 광주(廣州), 1561~1613】

    조선시대 문신․학자. 포천시 자작리에서 출생, 성장하였다. 백사 이항복, 봉래 양사언과 절친하였으며 특히, 이항복과의 사이에서 빚어진 많은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 이항복과 더불어 조선시대 대표적인 명재상으로 후세에 존경을 받고 있다.

  • 최익현 (崔益鉉)【본관 : 경주(慶州), 1833~1906】

    구한말 문신ㆍ학자ㆍ의병장. 포천시 신북면 가채리에서 출생하였다. 평생 벼슬자리에 연연하지 않고 청렴 강직한 삶을 실천하였다. 일생을 항일 구국운동에 전념하시다 74세의 일기로 일본 대마도의 감옥에서 단식으로 순국하였다.

  • 김평묵(金平默)【본관 : 청풍(淸風), 1819~1891】

    김평묵은 가산면 시우촌에서 출생하였고 집안 대대로 포천에 거주하였다. 이항로의 문하에서 면암 최익현(崔益鉉) 등과 동문수학하였으며, 의암 유인석(柳麟錫), 용서 유기일(柳基一) 등을 배출하였다. 1900년 규장각 제학(奎章閣提學)에 추증되었다. 문의(文懿)라는 시호를 받았다. 일동면 운담영당에 배향되었다.

  • 박 순(朴淳)【본관 : 충주(忠州), 1523~1589】

    박순은 조선후기 관료이자 학자로 주요 관직을 두루 거쳤으며, 1579년(선조 12)에 영의정에 임명되어 15년간 재직하였다. 조정에서 물러난 후에는 영평에 거주하며 ‘영평팔경’의 경치에 매료되어 많은 글을 남겼다. 조선 중기 대표적인 학자이자 시인으로 창수면 옥병서원에 배향되어 있다.

  • 서 성(徐㨘)【본관 : 대구(大丘), 1558~1631】

    서성은 지금의 경상북도 안동시에 있는 외가에서 태어났다. 송익필(宋翼弼)에게 학문을 배웠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왕을 호종하였고, 호소사 황정욱(黃廷彧)의 종사관이 되어 왕자를 모시고 피난하다가 회령에서 국경인(鞠敬仁)의 난에 붙잡혀 왜적에게 넘겨졌다. 그 후 탈출하여 돌아와 의병을 모아 길주와 명천에서 왜적을 물리친 후 전적에 제수되고 소모 어사가 되었다. 이후 형조와 병조의 판서를 역임하였으며 기로소에 들었다. 묘가 설운동 선영에 있다.

  • 성석린(成石璘)【본관 : 창녕(昌寧), 1338~1423】

    성석린은 고려말 조선초기 문신으로 현재 포천시 신북면 기지리에 거주하였다. 조선 태종이 즉위하면서 요직에 중용되면서 유명한 “함흥차사”의 인물이기도 하다. 저서로 『독곡집(獨谷集)』이 있다. 왕명으로 ‘태조 건원릉 비문(太祖健元陵碑文)’을 썼고, 정도전의 문집인 『삼봉집(三峰集)』 편찬에 참여하였다. 포천시 신북면 고일리에 묘가 있다.

  • 양사언(楊士彦)【본관 : 청주(淸州), 1517~1584】

    양사언은 포천 출신의 문장가이자 문신으로 1546년(명종 1)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후 곧바로 「운정기(雲亭記)」를 지어 명성을 떨쳤다. 금강산에 자주 들러 자연 경관을 즐기면서 읊은 ‘봉래 풍악 원화 동천(蓬萊楓嶽元化洞天)’이라는 글씨가 지금도 만폭동 바위에 새겨져 있다. 목민관 재임 시 각 지역마다 글 솜씨를 발휘하여 비문을 지었는데 그 암각문이 지금까지도 전한다. 특히 포천 영평천 변의 금수정에는 양사언과 관련한 많은 암각문이 전한다. 포천시 일동면 길명리에 묘와 사당이 있다.

  • 유응부(兪應孚)【본관 : 기계(杞溪), ?~1456】

    유응부는 현재 포천시 소흘읍 무봉리에서 출생한 인물로 단종의 복귀를 추진한 사육신 중 한명이다. 1452년(단종 즉위년) 의주 목사에 임명되고, 1453년(단종 1) 평안 좌도 도절제사를 역임하였다. 1456년(세조 2) 성삼문(成三問), 박팽년(朴彭年) 등이 명나라 사신을 초청하여 연회를 여는 날을 택하여 그와 성삼문의 아버지 성승(成勝) 등을 별운검(別雲劍)으로 정해 세조를 제거하고 단종을 왕으로 세울 계획이었다. 그러나 왕이 별운검을 세우지 않자 동모자 중 한 사람이던 김질(金礩)의 밀고로 사건이 알려지게 되었다. 모진 국문을 당하고 참형으로 죽었다.

  • 이 벽(李蘗)【본관 : 경주(慶州), 1754 ~ 1785】

    이벽은 조선후기 실학자로 현재 포천시 화현면 화현리에서 출생하였다. 조선후기 유명한 무인 집안에서 출생한 이벽은 조선후기 대학자인 정약용, 권철신 등과 교유하며 서학의 학문에 매진하였다. 또한 이승훈을 청나라에 보내 세례를 받게 하였으며, 그에게서 조선 최초로 세계를 받았다. 또한 한국 천주교회 설립의 주역으로 우리나라 천주교 전파에 큰 공을 세웠다. 그의 묘는 포천시 화현면 화현리 선사에 안장되었다가 천주교의 발상지인 경기도 광주시 천진암으로 이장되었다.

  • 이서구(李書九)【본관 : 전주(全州), 1754~1825】

    이서구는 1774년(영조 50) 가을 정시 병과에 급제하였으나, 관직을 버리고 5~6년간은 오로지 학문에만 뜻을 두고 사서(四書)를 탐독하였다. 이 무렵 이덕무·유득공·박제가 등과 함께 『한객건연집(韓客巾衍集)』에 참가함으로써 사가 시인(四家詩人) 또는 실학 사대가(實學四大家)라는 칭호를 얻었다. 육조의 판서 등 요직을 거쳤으며, 관직을 떠난 후에는 포천 양문에 은거하면서 여생을 보냈다.

  • 이중로(李重老)【본관 : 청해(靑海), 1577~1624】

    이중로는 1605년(선조 38)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 주사장(舟師將)[수군장] 등의 관직을 지냈다. 광해군의 폭정으로 민심이 혼란해지자 구인후(具仁垕)·정충신(鄭忠信) 등과 모의하였으며, 반정 성공 이후 정사공신 2등에 녹훈되고 청흥군(靑興君)에 봉해졌다. 포천시 신북면 고일리에 묘가 있다.

  • 이해조(李海朝)【본관 : 전주(全州), 1869~1927】

    이해조는 현재 포천시 신북면 신평리에서 1869년 2월 27일에 태어났다. 서울로 이주하여 신소설 작가로 활동하였다. 이해조의 작품은 초기에는 정치 소설적 형태를 보였지만 후기로 올수록 점차 대중적인 흥미를 강조하는 쪽으로 변하였다. 특히 당대의 풍속에 대한 폭넓은 관심을 보여주었다. 이해조의 문학적 업적은 소설과 번역, 근대적인 문학관 등을 통해 조명해 볼 수 있다. 주요 작품으로는 『구마검(驅魔劍)』[1908], 『자유종(自由鐘)』[1910]등이 있다.

  • 조 경(趙絅)【본관 : 한양(漢陽), 1586~1669】

    조경은 포천 지역 한양 조씨(漢陽趙氏) 집성촌의 시조로 임진왜란 때 소실된 이후 복구하지 못한 사당을 선영 아래에 건립하여 세거의 터전을 마련하였다. 1643년 통신사의 부사로 차출되어 일본에 다녀온 뒤 기행문인 『동사록(東槎錄)』을 저술하였다. 그리고 포천 읍지인 『견성지(堅城誌)』 편집을 시작하였으나 끝내 이루지 못하고, 그 뒤 이세욱(李世郁)이 자료를 모아 읍지를 편찬할 때 조경의 손자인 조수의(趙守誼)가 편집을 담당하였다. 포천시 신북면 가채리에 묘가 있으며, 신북면 신평리의 용연서원에 한음 이덕형과 같이 배향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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