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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천으로 떠나는 여행

우리시를 빛낸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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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가 있는 인물

조선시대 이전

성여완(成汝完)(묘-향토유적, 고려말 문신, 묘가 신북면 고일리에 있음)

선생의 본관은 창녕(昌寧), 호는 이헌(怡軒), 고려조의 문하시중(門下侍中) 송국(松國)의 증손, 봉상대부(奉常大夫) 군미(君美)의 아들이다. 1336년(고려 충숙왕5) 문과에 급제 후 예문 춘추 검열을 거쳐 군부정광, 상서우승, 전법판사 등을 역임하고 해주(海州), 충주(忠州) 목사(牧使)를 역임하였다. 1392년(공양왕4) 정몽주(鄭夢周)가 주살되고 고려의 국운이 기울어지자 모든 관직을 버리고 산수가 아름다운 포천의 왕방산(王方山) 아래 신북면 계류촌에 은거하면서 스스로 왕방거사(王方居士)라 하였다. 조선조 개국 후 검교문하시중(檢校門下侍中), 창성부원군(昌成府院君)에 봉하고 출사(出仕)할 것을 권유하였으나 받지 않고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절개를 지켰다.

조선전기

성석린(成石璘)(묘-향토유적, 조선초기 문신, 묘가 신북면 고일리에 있음)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자수(自修), 호는 독곡(獨谷). 조부는 판도총랑(版圖摠郞) 군미(君美)이고, 부원군 여완(汝完)의 아들이다. 이성계(李成桂) 등과 함께 공양왕을 내세운 공으로 찬화공신(贊化功臣)이 되고, 1392년 조선이 개국하자 이색(李穡)·우현보(禹玄寶) 일파로 몰려 추방되었다. 그 후 한성부판사(漢城府判事) 등을 거쳐 좌정승에 오르고, 1401년(태종 1) 좌명공신(佐命功臣) 3등으로 창녕부원군(昌寧府院君)에 봉해진 후, 1415년 영의정이 되었다. 시문에 능하고 초서(草書)를 잘 써서 당대의 명필로 유명하였다. 묘가 신북면 고일리에 있다.

양사언(楊士彦)(길명사․묘-향토유적, 조선전기 문신, 신북면 기지리 출생)
양사언 영정

조선전기 문신이자 명문자가이다. 자는 응빙(應聘), 호는 봉래(蓬萊)이고 본관은 청주(淸州)이며, 돈녕주부(敦寧主簿) 희수(希洙)의 아들로 천주산(天柱山) 아래 신북면 기지리에서 출생하였다. 삼등(三登), 함흥(咸興), 평창(平昌), 강릉(江陵) 4읍의 부사를 역임하였는데 가는 곳마다 선정을 베풀어 주민의 칭송을 받아 선정비(善政碑)가 세워졌으며 산수(山水)를 즐기며 주유하는 신선에 비유 도인이라고 칭송하였다. 1556년(명종11) 금강산 만폭동(萬瀑洞) 돌에 봉래풍악(蓬萊楓岳) 원화동천(元化洞天) 여덟자를 큰 글씨로 새겼는데, 포천에도 영평팔경의 금수정을 비롯한 곳곳에 선생의 일화, 시, 서, 암각문이 지금까지도 전해지고 있다.

양치(楊治)(충목단-도 기념물, 조선전기 무신, 신북면 기지리에 거주)

본관은 청주(淸州)이고 호는 퇴은(退隱)으로 도첨의시중(都僉議侍中) 기(起)의 증손, 찬성사 지수(之壽)의 손, 경안공(景安公) 천진(天震)의 아들로 충목단(忠穆壇)에 추배(追配)되었다. 세종 때 김종서(金宗瑞)가 야인(여진족)을 토벌하여 6진(六鎭)을 개척할 때 종사(從事)한 공을 인정받아 함경도병마절도사, 황해도병마절도사, 영암군수(靈巖郡守) 등을 지냈으나 계유정란(癸酉靖亂)으로 세조가 왕위를 찬탈하고, 사육신(死六臣)이 화를 입자 관직을 청산하고 포천 신북면 기지리에 은거하여 두문불출하였다. 정조 때 단종에 대한 충성을 인정받아 포상되었으며 묘는 신북면 기지리에 있다.

유응부(兪應孚)(충목단-도 기념물, 조선전기 무신, 소흘읍 무봉리 출생)

자는 신지(信之), 선장(善長), 호는 벽량(碧梁)이다. 사육신 중 한 명으로 성삼문(成三問)·박팽년(朴彭年) 등과 단종(端宗) 복위를 모의하고 명나라 사신을 초대하는 연회장소에서 세조를 살해하는 소임을 맡았으나 김질(金礩)의 배신으로 잡혀 혹독한 고문을 당하면서도 끝까지 복종하지 않아 죽임을 당하였다. 포천 소흘읍 무봉리에서 출생하였다.

유인선(柳仁善)(정려-향토유적, 조선전기 인물)

조선시대 효자. 어룡리 자작촌에서 출생했고, 신북면 계류리에 묘가 있음. 자는 공숙(公叔), 본관은 문화(文化), 군수 사의(思議)의 손, 진사 연(演)의 아들이다. 어려서부터 학문에 힘쓰고 또한 천선이 어질고 착하여 부모를 극진히 섬기어, 효성이 세상에 널리 알려졌으며 형제간의 우애가 돈독하였다. 1549년(명종 4) 효우정려문이 하사되었다. 효우비의 글은 영의정 민진원이 짓고, 글씨는 예조참판 김상옥이 섰으며, 뒷면은 양사언이 섰다.

조선중기

권종(權悰)(충신문-향토유적, 조선중기 문신, 소흘읍 고모리 출생)

조선시대 충신. 소흘읍 고모리에서 출생하였고, 이곳에 묘가 있다. 자는 희안(希顔), 본관은 안동, 중림찰방 지식의 아들이다. 효성으로 재령현감에 천거되었으며, 그 뒤에도 여러 군현의 수령을 지냈다. 임진왜란 때 의병을 모집해 활동했으며, 왜적과의 전투에서 아들 준(晙)과 함께 순절하였다. 후에 선조 임금이 이 이야기를 듣고 애도를 표하고 정려를 내렸다.

박순(朴淳)(옥병서원-향토유적, 조선중기 문신, 창수면 주원리 거주 및 묘가 있음)
박순 영정

자는 화숙, 호는 사암, 본관은 충주이고, 우윤 우(祐)의 아들이다. 박순은 대사헌, 대제학, 이조판서, 영의정 등을 두루 거쳤다. 조정에서 물러난 후에는 포천을 찾아 영평8경의 풍치에 매료되어 영평에서 많은 글을 남기고 학문을 강론하다 이곳에서 세상을 떠났다.

서성(徐省)(묘-도 기념물, 조선중기 문신)

조선중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달성(達城) 자는 현기(玄紀) 호는 약봉(藥峯)이며 시호는 충숙(忠肅)이다. 이이(李珥)·송익필(宋翼弼)의 문인으로 병조좌랑(兵曹佐郞) 때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왕을 호종, 호소사(號召使) 황정욱(黃廷彧)의 종사관(從事官)으로 함북(咸北)에 이르러 두 왕자와 황정욱 등이 포로가 되자 혼자 탈출했다. 이후 5도의 관찰사와 3조의 판서를 거쳐 판중추부사를 지냈다. 1613년(광해군 5) 계축옥사에 연루, 11년간 유배되었다가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형조판서에 복직, 이어 병조판서가 되었다. 이괄(李适)의 난과 정묘호란(丁卯胡亂) 때에는 각각 왕을 호종했다. 포천시 설운동에 묘가 있다.

신급(申礏)(정려-향토유적, 조선중기 학자)

내촌면 음현리에 정문(旌門)이 있음. 자는 중준(仲峻), 본관은 평산(平山). 별검(別檢) 화국(華國)의 아들이다. 어려서부터 학문에 힘써 널리 경서를 통독했다. 임진왜란 때 모친과 함께 이천(伊川)에 피난 도중 적을 만나 모친을 구하고 자신은 벼랑에 투신하여 죽었다. 숙종 때 이 사실이 알려져 효자정문을 내렸다.

오백주(吳伯周)(정려-향토유적, 조선중기 무신)

포천 어룡리에서 출생. 자는 국향(國鄕), 본관은 보성, 증한성부윤 만(晩)의 아들이다. 효성이 지극하여 부친이 병으로 고생하자 의원의 권유에 따라 깊은 산속을 헤매며 사람의 모습과 흡사한 인삼과 바위틈에서 석밀을 구하여 부친의 병을 완쾌시켰다. 부친이 위독하여서는 돌로 단을 만들어 하늘에 부친의 쾌유는 기도하였는데, 의정부와 포천을 잇는 축석령이라는 지명이 여기서 유래하였다고 한다. 1723년(경종 3) 효자정려를 하사받아 어룡리에 정려각이 남아있다.

이덕형(李德馨)(용연서원-도 유형문화재, 조선중기 문신, 용연서원 배향)
이덕형 영정

이덕형의 자는 명보, 호는 한음이다. 본관은 광주이고 지중추부사 민성의 아들이다. 어려서부터 외가인(유전) 자작리를 자주 출입했고, 양사언, 이항복 등과 교유하였다. 임진왜란 때 청원사가 되어 명나라의 원군 파병을 성공시키며 큰 공을 세웠으며, 38세로 정승에 올라 영의정까지 역임하였다. 광해군대에 정인홍, 이이첨 등의 무리가 인목대비를 폐하는 폐모론을 제기하였을 때 극력 반대하다 삭탈관직 되어 낙향(양근)해 생을 마쳤다.

이중로(李重老)(정사공신 교서․영정-보물, 조선중기 무신, 묘가 창수면 추동리에 있음)
이중로 영정

조선시대 무신. 묘가 창수면 추동리에 있다. 자는 진지(鎭之), 본관은 청해, 개국공신 지란의 후손, 우의정 정언신의 사위이다. 1623년 인조반정 당시 훈련대장 이흥립, 장단 부사 이서 등과 함께 장졸을 모아 가담하여 정사공신 2등에 책록되고 청흥군에 봉해졌다.

이항복(李恒福)(화선서원․묘-도 기념물, 조선중기 문신, 가산면 금현리 거주)
이항복 영정

포천 가산면 금현리에 거주했다. 자는 자상, 호는 백사․동강․필운이며, 본관은 경주이다. 참찬 이몽량의 아들이며, 권율의 사위이다. 이항복은 관직생활 40년 동안 요직을 두루 거쳐 영의정의 자리에 올랐으며, 특히 왜란 때는 왕을 보필하며 민생을 구하는데 큰 공을 세웠다. 그는 1618년(광해 10) 유배지인 북청에서 세상을 떠났고, 시신은 그의 선현들이 있는 포천 가산면으로 옮겨져 안장되었다.

조경(趙絅)(용연서원-도유형문화재, 묘-향토유적, 조선중기 문신, 신북면 가채리 거주)
조경 영정

조선중기 문신. 봉사 이익남의 아들이며, 본관은 한양, 자는 일장, 호는 용주이다. 포천 신북면 가채리에서 거주하였다. 광해군의 폭정이 시작되자 은거하였으나, 인조반정 이후 천거되어 관직에 나아갔다. 정묘호란 당시 세자를 보필했으며 척화를 주장하였다. 조경은 관직생활동안 강직한 성품과 높은 학덕으로 모든 학자들에게 귀감이 되었으며, 또한 문학과 글씨도 뛰어나 청백리에 녹선 되었다.

조득남(趙得男)(정려-향토유적, 조선중기 무신, 화현면 거주)

본관은 한양이고, 조정제의 아들이다. 포천 화현면 화성리에서 출생하였다. 어려서부터 천성이 어질고 효성스러웠으며 무예가 뛰어났다. 정묘호란이 일어났을 때 왕을 강화까지 호위하였고,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에서 항전하다 전사하였다. 1725년(영조 1) 충신정려를 내려 애국충절을 기리도록 하였다.

조선 후기

김평묵(金平黙)(운담영당․동음사-향토유적, 조선말기 학자, 가산면 출생, 묘가 일동면 화대리에 있음)
김평묵 영정

가산면 시우촌(時雨村) 출생하였고 집안이 대대로 포천에 거주하였다. 본관은 청풍(淸風)이고 자는 치장(穉章)이며 호는 중암(重菴)으로 성양(聖養)의 아들이다. 1842년(헌종 8) 24세 때부터 양평에 거주하던 이항로(李恒老)에게 수업하여 수제자로 학문의 적통(適統)을 이어받았다. 1866년(고종 3) 병인양요(丙寅洋擾)가 일어나자 조정에서 이항로를 동부승지로 임명함에 함께 상경하여 스승과 함께 난국타개책으로 전수척화론(戰守斥和論)을 상소하였다. 1880년(고종 17) 선공감가감역에 제수되었으나 관로에 나가지 않고 이듬해 영남 유생 이만손(李晩孫) 등이 만인소(萬人疏)를 올리자 격려문을 보내며 위정척사(衛正斥邪)를 주장하다가 전라도 지도(智島)로 유배당하여 3년간 유배생활 끝에 갑신정변으로 풀려났다. 1886년(고종23) 일동면 운담(雲潭)으로 이사하여 이듬해 향음주례(鄕飮酒禮)를 베풀자 김병덕, 최익현, 유기일 등 100여명의 선비가 참석하기도 하였다. 묘는 백운산(白雲山) 아래 다목동에 있는데 묘갈문은 최익현이 지었으며, 1975년 묘소가 황폐되어 화대리(禾岱里) 마고동(麻姑洞)으로 이장하였다.

최익현(崔益鉉)(조선말기 문신․의병장, 신북면 가채리 출생)
최익현 영정

구한말 문신, 학자. 포천 신북면 가채리에서 출생하였다. 자는 찬겸(贊謙), 호는 면암(勉庵), 본관은 경주이다. 의정부 참정 최대(崔岱)의 아들이며, 화서 이항로의 문인이다. 1868년 경복궁 중건과 당백전 발행에 따르는 재정의 파탄 등을 들어 흥선대원군의 실정(失政)을 상소하여 관직을 삭탈 당했다. 이후 일본과의 통상조약과 단발령에 격렬하게 반대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항일의병운동의 전개를 촉구하며 전북 태인에서 의병을 모았다. 그러나 순창에서 패하여 쓰시마섬에 유배되었다가 그곳에서 순국했다.

근현대

이규채(李圭彩)(공적비-향토유적, 독립운동가)

가산면 방축리 군자정 출신으로 본관은 경주이다. 자는 공삼, 호는 경산․동아․우정이며, 이철영의 아들이다. 3․1운동이 일어난 후 창신서화연구회를 창설, 학생들에게 항일의식을 강조하다 발각되자, 독립운동을 위해 1921년 중국 상해로 망명했고, 1924년 ‘대한민국임시정부’임시의정원 충청도의원으로 피선되어 활동하였다. 임시정부 지원단체인 한국독립당에 가입해 정치부위원 겸 군사부참모장에 선임되어 활동하였다. 그 뒤에도 신한독립당을 조직하여 위원장으로 독립운동을 했으며, 해방 후에는 정계로 나아가 미․소 공동회의대책 국민연맹대표, 반탁국민연맹회 상무위원 등을 역임했다. 정부에서는 1963년에 건국공로훈장 국민장을 추서했다.

이범영(李範英)(공적비-향토유적, 독립운동가)
이범영 초상

경기도 포천 가산면 출신으로 민족교육자, 독립지사로 활동하였으며, 호는 동석(東石), 본관은 전주(全州)이다. 국권회복을 목적으로 한 신민회(新民會) 계열의 비밀 청년단체인 대동청년단(大東靑年團)을 창립해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졸업 후에는 향리에 청성학교(靑成學校)를 설립하여 충의를 교훈으로 민족혼을 고취했고 3․1운동 후 중국에 망명하였다. 1919년 12월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지원단체인 노동사회개진당(勞動社會改進黨)을 조직하며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해 1963년 대통령 표창,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조영원(趙永元)(공적비-향토유적, 독립운동가)

호는 각산(覺山), 이명(異名)은 용완(鏞完)이고 포천 창수면 추동리 사람이다. 1907년 유신학교(維新學校)를 졸업하고 국권이 일제에 의하여 강탈당하자 당시 서간도(西間島)에 망명중인 이동녕(李東寧), 이시영(李始寧) 등과 연락을 취하며 국내에서 활동하다가 1920년 8월 상해로 망명 동년 9월 대한민국 임시정부 의정원의원으로 피선되었으며, 1921년 3월 의정원 비서장을 겸임하였다. 동년 5월에는 의열단(義烈團)에 가입하여 중앙집행위원을 역임하였다.

최면식(崔勉植)(채산사-도 기념물, 공적비-향토유적, 독립운동가)
최면식 영정

포천 신북면 가채리에서 태어났다. 면암 최익현의 손자이며 자는 경소, 호는 염제이다. 1910년 경술국치를 당하자 국권회복을 위해 군자금 모금 등 독립운동을 전개했으나, 발각되어 수차례 옥고를 치렀다. 1917년 대한광복회에 가입 활동하다 1921년 광복단 사건으로 다시 공주형무소에 무기수로 복역하게 되었으며, 복역 중 건강악화로 풀려났으나 병의 악화로 1944년 조국광복을 보지 못하고 일생을 마쳤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해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포천출생 인물

조선전기

백인영(白仁英)(조선전기 문신, 포천출신, 묘가 동교동에 있음)

포천 동교리 나무골에서 출생하였고, 자는 언화(彦華), 본관은 수원, 익장(益長)의 아들이다. 1527년(중종32)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 후 여러 벼슬을 거쳐 1529년(중종34)에 서장관(書狀官)으로 중국에 다녀왔다. 1543년(중종39) 사헌부장령, 내자시정을 거쳐 1546년(명종1)에는 홍문관 교리에 제수되었다. 우부승지를 거쳐 도승지(都承旨)를 지내고 호조참판(戶曹參判)에 이르렀다. 인영(仁英)과 그의 아우 인웅(仁雄), 4촌 인호(仁豪), 인걸(仁傑) 등 사종형제(四從兄弟)는 이름자마저 영웅호걸(英雄豪傑)인데다가 문장에 뛰어나 사백문장(四白文章)의 칭호를 받았다. 묘는 동교리 나무골에 있다.

유순(柳洵)(조선전기 문신, 포천출신)

조선전기 문신으로 포천출신이다. 자는 희명, 호는 노포당, 본관은 문화이다. 개국원종공신 유만수의 현손이다. 부제학 ·형조참판을 지내고 무오사화로 한때 파직되었다가 호조판서·우의정·좌의정을 거쳐 영의정에 올랐다. 시부(詩賦)에 뛰어나 왕명을 받고 서거정 등과 《연주시격(聯珠詩格)》을 한글로 번역하였다.

조선중기

김권(金權)(조선중기 문신, 가산면 가산리 출생)

포천 가산면 가산리에서 출생하였다. 자는 이중, 호는 졸탄, 본관은 청풍이다. 현풍참봉 김덕무의 아들로 율곡 이이, 우계 성혼에게 학문을 배웠으며, 이항복, 이덕형 등과 교유하였다. 임진왜란 때 선조의 의주 몽진을 뒤따랐고, 세자를 추종하여 호남에 다녀왔다. 난이 끝난 뒤 수찬 · 연안부사 등을 거친 후 벼슬이 호조참판에 이르렀다. 폐모론에 반대하다가 강계 ·무안 등지에 유배, 인목대비의 서궁 유폐설을 듣고 식음을 전폐 · 자결하였다.

양사기(楊士奇)(조선중기 문신, 신북면 기지리 출생)

포천 신북면 기지리에서 출생하였다. 본관은 청주, 자는 응우(應愚), 호는 청계(淸溪), 죽재(竹齋)이다. 일곱 고을의 수령을 지내며 선정을 베풀었고, 선조 즉위 후에는 외적의 침입에 대한 방비책을 올렸다. 형 양사언과 함께 시에 뛰어났다.,/

양사준(楊士俊)(조선중기 문신, 신북면 기지리 출생)

신북면 기지리에서 출생하였다.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응거(應擧), 호는 풍고(楓皐)이며 양사언의 형이다. 첨정·평양서윤·간성군수 등을 지냈으며, 1555년 을묘왜변 때 김경석의 종사관이 되어 왜구와 싸웠다. 동생 양사언·양사기와 더불어 당대에 문명을 떨쳤다.

유득일(柳得一)(조선중기 문신, 일동면 유동리 출생)

포천 일동면 유동리 용호동에서 출생하였다. 자는 령숙(寧叔), 호는 귀와(歸窩), 본관은 창원, 현석 박세체(玄石 朴世采)의 문인이다. 1667년(숙종3) 알성문과(謁聖文科)에 급제하여, 예문관(藝文館)에 보임되었으며 1682년(숙종8) 사헌부 지평(司憲府 持平)에 올랐다. 이듬해 서인(西人)의 과격파 김익훈(金益勳)이 남인(南人)을 제거하기 위해 모해(謀害)함으로 서인의 소장파로서 그 간계를 폭로하고 처벌을 주장하다가 진도군수(珍島郡守)로 좌천되었다가 이어 파직되었다. 1695년(숙종21) 승정원 승지를 거쳐 대사간(大司諫)에 발탁되었다. 그 뒤 한성판윤, 병조판서 등에 임명되어 군정 쇄신에 힘썼다. 강직한 성격으로 불의(不義)를 용납하지 않는 선비정신이 투철한 인물로 모범적인 관리였다. 묘는 일동면 유동리 선영에 있다.

유전(柳琠)(조선중기 문신, 자작동 출생, 일동면 금주리에 묘가 있음)

포천 자작동에서 출생하였다. 본관은 문화(文化), 자는 극후(克厚), 호는 우복(愚伏)이고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1583년 한성부판윤이 되었다. 1585년 우의정이 되고, 1588년 사은사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후 좌의정을 거쳐 이듬해 영의정에 올랐다. 1589년 기축옥사 때 정여립이 사형되자 평난공신에 책록되고 시령부원군에 봉해졌다. 묘는 일동면 금주리에 있다.

황정욱(黃廷彧)(조선중기 문신, 영중면 거사리 출생)
황정욱 영정

본관은 장수(長水)이고 자는 경문(景文)이며 호는 지천(芝川)으로 조선 초기 영의정을 지낸 희(喜)의 후손이자 행호분위부호군(行虎賁衛副護軍) 열(悅)의 아들로 영중면 거사리(居士里)에서 출생하였다. 1558년 식년문과 병과로 급제하여 사관(史官)을 배수받아 예문관검열, 시강원설서 등을 역임하였다. 1589년 정여립(鄭汝立)의 모반사건에 연루되어 파직되었으나 무고임이 밝혀져 복직되었고 다음해 광국공신(光國功臣) 1등에 책훈되고 장계부원군(長溪府院君)에 책봉되어 대제학 예조판서 병조판서를 역임하였다. 임진왜란 때 왕자 순화군(順和君) 보(災)를 배종(陪從)하던 중 왜군에게 붙잡혀 왜장으로부터 선조에게 항복 권유의 상소문을 쓰라고 강요받고 거부하였으나, 왕자를 죽인다는 위협에 아들 혁(赫)이 대필하였다. 이 일로 동인(東人)들의 탄핵을 받고 유배되었다. 문장과 시, 서예에 능하여 이이(李珥)가 그 문장을 김종직과 비교할 만 하다고 칭찬하였으며 저서로는 {지천집 芝川集}이 있다.

조선후기

성대중(成大中)(조선후기 문신, 소흘읍 초가팔리 출생)

소흘면 초가팔리에서 출생하여 성장하였다. 자는 사집(士執), 호는 창녕(昌寧), 내섬시직장(內贍寺直長) 효기(孝基)의 아들. 지재 김준(遲齋 金焌)의 문인이다. 1792년 문체반정(文體反正) 때에는 노론계 북학자들 중에서 거의 유일하게 정조의 칭찬을 받았던 조선 후기 학자 겸 문신. 고문(古文)을 중시하였다. 저서로는《청성집》이 있다.

성해응(成海應)(조선후기 문신, 소흘읍 초가팔리 출생, 가산면 금현리에 묘가 있음)

조선조 후기의 실학자이며 자는 용여(龍汝), 호는 연경재(硏經宰), 본관은 창녕(昌寧), 내섬시직장(內贍寺直長), 효기(孝基)의 손, 부사 대중(大中)의 아들로 소흘읍 초가팔리에서 출생 성장하였다. 벼슬은 부사(府使)에 그쳤으나 영조 ·정조 시대의 대표적 실학자로서 경학(經學)에 정통했다. 이덕무(李德懋) ·유득공(柳得恭) ·박제가(朴齊家) 등과 친교를 맺었으며, 저서로는 《동국명신록(東國名臣錄)》이 있다. 가산면 금현리에 묘가 있다.

유숭(兪崇)(조선후기 문신, 일동면 유동리 출생, 묘가 일동면 유동리에 있음)

조선후기 문신으로 포천 일동면 유동리에서 출생하였다. 자는 원지(元之), 호는 관재(寬齋), 본관은 창원(昌原),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 회일(晦一)의 아들로 포천 일동면 유동리(柳洞里) 출신이다. 이인좌의 난 때 충청도 소모관을 거쳐, 공조 참판이 되었다. 시조 한 수가 《청구영언》에 전한다. 묘는 일동면 유동리에 있다.

유기일(柳基一)(조선후기 학자, 소흘읍 고모리 출생, 신북면 계류리에 묘가 있음)

구한말 학자로 소흘읍 고모리에서 출생하였고, 신북면 계류리에 묘가 있다. 호는 용서(龍西), 본관은 문화(文化)이다. 일찍이 화서 이항로의 문하에 들어 성리학을 공부했고, 이항로 사후에는 중암 김평묵의 문하에 들었다. 면암 최익현과 교분이 두터웠으며, 김평묵, 최익현과 함께 구한말 국권회복을 위한 위정척사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벽(李蘗)(한국 천주교의 성조, 화현면 화현리 출생)
이벽 영정

조선 후기의 학자로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덕조(德操) 호는 광암(曠庵) 세례명은 요한세자이다. 동지중추부사를 지낸 아버지 이부만과 어머니 청주 한씨 사이에서 육남매 중 둘째 아들로 우리시 화현면 화현리에서 태어났다. 광암 이벽은 남인학자의 일원으로 이가환(李家煥)·정약용(丁若鏞)·이승훈(李承薰)·권철신(權哲身)·권일신(權日身) 등과 깊은 교유관계를 맺었다. 선생의 집안은 유명한 무반가문으로 무과를 통해 출세하기를 원하는 아버지와 가문의 소원을 뿌리치고 서학(천주학)에 매진하다 생애를 마쳤다. 묘는 화현면 화현리 산289번지에 있다가 1979년 6월 경기도 광주의 천진암으로 이장했으며 묘터와 비석이 있다. 광암 이벽선생은 국내에서 첫 번째 세례 받은 우리나라 최초의 신자로 서학을 학문에서 종교적 신앙으로 승화시키고 조선 최초의 천주교 교단을 조직하여 강학을 주도하며 천주교를 널리 전파하여 한국천주교회의 창립 성조(聖祖)로 추앙 받고 있다.

근현대

권동진(權東鎭)(독립운동가, 포천 출생)
권동진 초상

한말 독립운동가로 호는 애당(愛堂)․우당(憂堂) 포천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자랐다.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함안군수·육군참령을 지냈고, 3·1운동의 핵심적 지도인물로 체포되어 복역하였다. 신간회를 조직하여 부회장으로 활동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이해조(李海朝)(신문학 소설가, 포천 출생)
이해조 초상

전주인으로 조선조 16대왕 인조의 3남 인평대군(麟坪大君)의 10대손이며 이철용(李哲鎔)의 자이다. 포천에서 태어나 어린시절을 이곳에서 자랐다. 호는 동농(東濃), 이열재(李悅齎)이고, 필명은 우산거사(牛山居士), 선음자(善飮子), 하관생(遐觀生), 석춘자(惜春子), 신안생(神眼生), 해관자(解觀子)이다. 언론계에 종사하면서 《제국신문》과 《매일신보》 등을 통해 30편에 가까운 신소설을 발표하였다.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자유종(自由鐘)》(1910)은 주인공들의 토론형식을 빌려 정치이념을 제시한 작품이며 《화(花)의 혈(血)》(1910)은 부패관리의 부정을 폭로한 소설이다. 대체로 그의 신소설은 신교육과 개화사상을 고취하면서 당시 사회의 부조리를 반영하였다.

포천 활동 및 거주

조선전기

김수동(金壽童)(조선전기 문신, 내촌면 출생)

조선전기 문신으로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척의 아들이다. 자는 미수, 호는 만보당(晩保堂)이며 내촌면 음현리에서 살았다. 성종 ·연산군 대에 관직을 지냈으며, 갑자사화 때 연산군의 신임을 받아 정헌대부에 가자(加資)되었다. 중종반정에 참여하였으며. 1510년 영의정에 올랐다. 재치가 넘쳐 연산군의 폭정으로부터 많은 문신들을 구하였으며 청렴을 지켰다.

이몽량(李夢亮)(조선전기 문신, 포천 성장, 가산면 금현리에 묘가 있음)

조선전기 문신으로 포천에서 성장했고 가산면 금현리에 묘가 있다. 자는 응명(應明), 본관은 경주, 고려말의 대학자 익재 이제현(益齋 李齊賢)의 후손이고, 좌찬성(左贊成) 예신(禮臣)의 아들이며 백사 이항복의 아버지이다. 성품이 평온하였으며 사람과 말을 할 때는 정성을 기울였고 일에 임하여서는 꿋꿋하고 장엄하여 그 기운을 꺾을 수 없었다. 인륜에 관한 문제는 지극한 성품을 다하여 가난한 사람을 만나면 구제해 주었으며 처신함에는 청렴하고 검약하였다. 1528년(중종 23) 문과에 급제하여 여러 관직을 두루 거쳤으며, 형조판서, 대사헌, 좌참찬까지 역임하였다.

조선중기

김창협(金昌協)(조선중기 문신, 이동면 연곡리에 거주)
김창협 영정

문곡 김수항(文谷 金壽恒)의 둘째 아들로 출생하였다. 중년에 영평(永平) 이동면 연곡리에서 살았다. 자는 중화(中和), 호는 농암(農巖), 본관은 안동, 좌의정 청음 김상헌(淸陰 金尙憲)의 증손, 대학자 이단상(李端相)의 사위, 송시열, 이인상의 문인이다. 숙종 때 대사성 등의 관직을 지냈으나, 기사환국으로 아버지 수항이 사사(賜死)된 뒤 은거하고 후에 관직도 사양하였다. 그의 학설은 이기설로 이이보다는 이황에 가까웠으며, 문학과 유학의 대가로서 이름이 높았고, 호론을 지지하였다.

김창흡(金昌翕)(조선중기 학자, 이동면 연곡리 거주, 묘가 신읍동에 있음)
김창흡 영정

자는 자익(子益)이고, 호는 삼연(三淵)이며, 본관은 안동이다. 척화학자(斥和學者)로 유명한 청음 김상헌(淸陰 金商憲)의 증손이고, 영의정 수항(壽恒)의 아들이다. 영의정 창집(昌集 ), 대제학 창협(昌協)의 아우이다. 중년에 이동면 연곡리에 거주하였으며, 묘가 포천 신읍동에 있다. 기사환국 때 아버지가 사사되자 형 창집 ·창협과 함께 은거하였다. 후에 관직이 내려졌으나 모두 사양하였다. 성리학에 뛰어나 형 창협과 함께 이이 이후의 대학자로 이름을 떨쳤으며, 낙론(洛論)을 지지하였다.

이시백(李時白)(조선중기 문신, 가산면 정교리에 거주)

조선중기 문신으로 포천 가산면 정교리에 거주했으며, 자는 군실(君實), 호는 수우당(守愚堂)으로 세종의 넷째아들 임영대군(臨瀛大君)의 현손으로 아버지는 한음군 현(漢陰君 俔)이다. 1609년(광해1) 사마시에 합격하고 벼슬길에 나가갔으나 광해군의 패륜행위가 일어나자 이를 반대하던 아버지 한음군이 조정에서 축출되자 벼슬을 버리고 포천 가산면 정교리에 낙향하여 유유자적하며 세월을 보냈다. 인조반정(仁祖反正) 후 다시 서용(敍用)되었다. 1627년(인조5)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왕을 호종(扈從)하였다.

조선 후기

이서구(李書九)(조선후기 문신, 영중면 양문리에서 살았다)
이서구 영정

자는 낙서(洛書), 호는 척재, 강산(薑山), 석모산인(席帽山人)이고 증영의정 원(遠)의 아들로 영중면 양문리에 거주하였다. 1774년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사관(史官) ·지평을 거쳐 승지 ·대사간 ·이조판서 ·대사헌 ·우의정 등을 역임했다. 왕명으로 《장릉지(莊陵誌)》 《춘추(春秋)》 《정조실록》 등의 편찬에 참여했다. 명문장가로서 특히 시명(詩名)이 높아 박제가(朴齊家) ·이덕무(李德懋) ·유득공(柳得恭)과 함께 한시(漢詩)의 4대가로 알려졌으며, 오언고시(五言古詩)에 능했다. 문집으로 《척재집》 《강산초집(薑山初集)》이 전한다.

김석문(金錫文)

자는 병여(炳如), 호는 대곡(大谷), 본관은 청풍으로 최초로 지전설(地轉說)을 주장하였다. 태양의 둘레를 선회하는 별들이 모두 제각기 궤도를 따라 선회할 뿐만 아니라 지구도 남북극을 축으로 하여 제자리에서 1년에 366회전한다고 하였다. 또 일정한 시기를 주기로 인류역사와 문명, 자연현상이 흥망성쇄를 되풀이한다는 순환론적 역사철학을 주장하였다. 《역학도해(易學圖解)》를 저술하였고, 숙종 때 유일(遺逸)로 천거된 뒤 여러 관직을 거쳐 1726년(영조 2) 통천군수(通川郡守)를 역임하였고 만년에는 포천에서 살았다.

이경여(李敬輿)

본관 전주(全州), 자 직부(直夫), 호 백강(白江)이며, 1601년(선조 34)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1609년(광해군 1) 증광문과에 급제하였으나 광해군의 횡포가 심해지자 낙향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부교리(副校理)에 오르고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왕을 남한산성에 호종하고, 그 뒤 형조판서로 승진하였다. 1642년(인조 20) 배청파(排淸派)로 청나라 연호를 쓰지 않았다는 밀고를 받고 청나라 선양에 끌려가 억류되었다가 이듬해 우의정이 되었고 효종 즉위 이후 영의정까지 역임하였다. 시문(詩文)과 글씨에 뛰어났으며 부여의 부산서원(浮山書院), 진도의 봉암사(鳳巖祠), 흥덕의 동산서원(東山書院)에 배향되었다. 문집에는 《백강집》이 있다.

인평대군(麟坪大君)

인조의 셋째아들이며 효종의 동생으로 이름은 요(㴭), 자는 용함(用涵), 호는 송계(松溪)이다. 병자호란 이후 볼모로 심양(瀋陽)에 갔다가 이듬해 돌아온 이후, 1650년(효종 2)부터 네 차례에 걸쳐 사은사(謝恩使-사신)가 되어 청나라에 다녀왔다. 학문에도 소양이 깊어 제작백가에도 정통하였고, 시·서·화(詩·書·畵)에도 뛰어났으며 중국인 화가 맹영광과 가깝게 지내기도 하였다. 현존하는 그의 작품은 희귀한 편으로 서울대학교박물관 소장의《산수도 山水圖》, 홍성하 소장의《노승하관도 老僧遐觀圖》, 정무묵 소장의《고백도 古栢圖》등이 알려져 있을 뿐이다. 이외에 『송계집』·『연행록』·『산행록』의 저서를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