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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천으로 떠나는 여행

포천의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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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포천의 주산(主山) 역할을 하는 왕방산(王方山)은 ‘임금이 찾던 곳’이란 의미

포천시는 역사적으로 고대부터 한사군(漢四郡;중국군현)과 삼한의 대치지역이었으며, 삼국의 접경지대로 한강을 둘러싼 격전지였다. 또한 고려시대에는 원나라(몽고)의 주요 침투 경로였으며, 조선시대의 왜란과 호란, 현대의 6.25전쟁을 거치면서 포천지역은 관방상의 요충지로 부각되었다. 포천에 산성이 많은 것도 이 때문으로 생각된다. 이러한 이유에서인지 포천에는 호국, 충절의 기상이 충만해 많은 명현을 배출했다. 사육신 중 한명인 유응부와 임진왜란 때 국난 극복을 위해 공을 세운 오성 이항복과 한음 이덕형 그리고 구한말 외세의 침략에 항거한 김평묵, 최익현 등 나라를 위해 충절을 받친 많은 인물이 많았으며 그들을 위한 사당과 정려(旌閭)가 포천 곳곳에 세워져 있다. 한편 군사 요충지였던 포천지역은 조선전기 임금의 사냥장과 강무장(講武場-군사훈련장)으로 이용되어 태조, 태종, 세종 등 많은 임금이 찾던 곳이다. 현재 포천의 주산(主山)인 왕방산(王方山)의 명칭도 ‘임금이 찾던 곳’이란 이유에서 붙여졌다. 왕방산에서는 임금이 친히 행차해 잡은 사냥감으로 하늘에 제사를 지내며 기원을 했던 곳이기도 하다.

한반도의 중심인 포천은 “호국과 충절”의 고장이며 “상업발달의 요충지”

조선후기 사회가 급변하던 시기 포천은 근기지역을 대표하는 상업도시로 명성을 얻었다. 서울(한성)과 동북(강원․함경도)을 이어주는 주요 교통 중심지로 물산의 유통이 빈번하여 상업이 발달한 것이다. 특히 소흘읍 송우리에 있는 송우점과 송우장은 조선후기 경기북부의 대표적인 점막 시장(점포 상점)으로 관서와 도성을 연결해주는 상업 요충지였다. 이는 한국의 근대화를 이끈 주요한 원동력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