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포천으로 떠나는 여행

포천의 역사

> 어디로 갈까 > 문화역사여행 > 포천의역사 > 우리시를 빛낸 인물 > 포천의 역사

포천시는 지정학적으로 한반도 중앙에 위치

포천시는 지정학적으로 한반도 중앙에 위치하고 있으며, 하천(한탄강, 영평천, 포천천)을 중심으로 한탄강 유역의 구석기 유적, 영송리 선사유적, 자작리 유적 등 선사시대(구석기시대)부터 주거지가 형성되었다. 특히 청동기시대 대표적 묘제 문화인 고인돌(지석묘)을 통해 볼 때 포천지역에는 선사시대부터 많은 인구가 거주했을 것으로 보인다. 가산면에 소재한 금현리 고인돌의 경우 상석의 중량이 약 32톤가량으로 이 돌을 옮기는데 약 200여 명의 인력이 필요해 부락의 인구가 적어도 1,000명 쯤 될 것으로 추정되며, 자작리, 금현리, 수입리, 추동리, 중리 등의 고인돌이 위치한 곳을 중심으로 집단 주거지가 형성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특히 자작동에 있는 자작리 지석묘를 중심으로 한 ‘포천 자작리 유적지’에서는 남북의 길이가 23.79m에 달하는 대형 움집터가 발굴되어 삼한시대부터 한성백제 시대인 3~4세기를 전후한 시기에 자작리를 중심으로 독자적인 정치세력이 형성되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물골(물의 고을) 이란 의미인 ‘마홀’에서 물을 품고 있는 ‘포천’ 까지

포천지역은 삼한시대 마한의 영향권에 포함되었으며, 이후 백제의 지배영역에 속했으나 고구려와 대치되는 접경지역에 위치하고 있었다. 5세기 중반 고구려가 남진정책을 펼치며 한강유역을 차지할 때 포천도 이에 속하게 되었으며 마홀군(馬忽郡)이란 지명이 붙여졌다. 마홀의 명칭은 군내면에 소재한 반월성의 발굴과정에서 출토된 명문기와(馬忽受解功口單)에서 찾을 수 있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면서 포천지역은 견고한 성(城)이 많다고 하여 견성군(堅城郡)으로 불리다가, 고구려 영광을 되찾겠다고 주창한 궁예가 철원을 중심으로 세력을 확장하면서 그의 영향력에 들게 되었다. 포천은 태봉국에서 고려로 왕건이 교체되던 시기 많은 전투가 벌어졌던 곳이기 때문에 궁예와 왕건에 얽힌 이야기가 많이 전한다. 아직도 한탄강, 명성산, 태봉산성(성동리산성) 등에는 궁예와 왕권의 이야기가 지명 또는 전설이 되어 전해지고 있다. 조선이 건국된 후인 태종 13년(1413)에는 팔도의 군현제 개편에 따라 현재 포천지역에 포천현을 설치하여 포천이라는 행정명칭이 처음 사용되었다.

영평의 산수에 사로잡인 선비들 영평팔경에 취해

현재의 포천시는 포천현과 영평현이 합쳐져 형성되었다. 영평현은 지금의 영중, 창수, 일동, 이동, 영북, 관인면 일대로 1914년 포천과 최종적으로 통합되기 이전까지 독자적인 군현체제를 가지고 있었다. 영평은 고구려의 영역에 속했을 때 양골현(梁骨縣)이란 지명이 처음 생긴 이후 신라시대 때 동음(洞陰), 고려 때 영흥(永興) 이라 불렀으며, 1394년인 조선 태조 3년에 와서 비로소 영평이란 지명이 생겨났다. 영평지역은 예부터 산자수명(山紫水明)한 고장으로 그 뛰어난 절경을 ‘영평팔경’이라 불렀다. 그리고 선비들의 꿈인 금강산 유람을 가기위해 반드시 머물렀던 곳이 영평지역이다. 이 때문인지 영평지역에는 많은 문사들의 족적이 남아 있는데 그 중 대표적인 것이 금수정과 창옥병의 암각문이다. 그곳에서는 조선전기 4대 문장가라 칭송받는 봉래 양사언과 석봉 한호의 필체를 만나볼 수 있다.